한 권의 책을 읽고 저자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철학적 주제들을 문학적 글쓰기로 풀어나간 니체의 책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게다가 하이데거와 데리다가 안 그래도 어려운 니체를 더 어렵게 만들어 줍니다. 이번에는 들뢰즈와 푸코도 등장했습니다. 제 넋두리를 살짝 보태자면, 여전히 소화되지 않은 개념들이 매주 쌓여갑니다. 엉성하게나마 이해된 부분도 아주 조금은 있겠지만 뭔 얘기를 하는 건지 난 모르겠다 하고 넘어간 게 대부분입니다. 그리하여 <데리다-니체>도 읽었다는 데 의의를 두는 책들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지요.....
이번 주에 함께 읽은 3장에서 저자인 벨러는 여러 철학자들의 니체 독법을 서술합니다. 1장에서 언급되었듯이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당시 독일의 시대 상황과 자신의 사상적 흐름이 뒤섞인 결과로 보여집니다. 예를 들어 니체의 저작인 <즐거운 학문>의 제목을 해석할 때도 그렇습니다. 이 제목이 남프랑스의 옛 음유시인들의 ‘즐거운 군도’라는 표현과 관련된다는 니체의 설명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이데거는 학문이라는 개념은 본질적인 앎을 향한 태도와 의지를 의미하고, 즐거움은 우월한 상태의 명랑성을 표현한다고 해석해버립니다. 이렇게 하이데거는 계속해서 니체를 형이상학적 입장에 끼워넣어 버립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니체와 철학>에서 들뢰즈가 제시하는 니체는 철학자로서의 전통적인 상과 단절됩니다. 개념들의 위상학 대신에 변화하고 미끄러지는 지배 형식들을 가진 힘들의 위상학이 등장합니다. 또한 푸코는 니체의 기호 이론에 대해 계보학적인 접근방법을 보여줍니다. 사건들을 목적론적으로 보는 ‘역사’와 달리 ‘계보학’은 사건들의 우연성과 목적성 바깥에 있는 세부적인 일들에 주목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니체의 계보학적인 분석이 보여주려는 것은 사물들의 배후에 은밀한 무시간적 본질 따위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읽은 1, 2장과 달리 3장에서는 니체의 저술들이 많이 인용됩니다. 계속해서 강조되듯이 니체의 기호는 궁극적 의미로 확정될 수 있는 일체의 진리를 결여하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월적 기의나 어떤 확실한 근거에 의존하지 않는 끊임없는 암호 해독, 무한한 해석이 작동해야 합니다. 니체가 실천한 이런 해석 방식은 세계를 놀이로서 긍정하는 태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요. 세계의 놀이, 예술의 놀이, 철학의 놀이에 관한 니체의 구상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구호에 응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다의적 개념을 설명하면서 니체는 예술의 목적에 맞서는 싸움은 예술 안에 있는 도덕화하려는 경향에 맞서는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니체는 예술가의 본능은 예술보다는 삶을 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니체에게 예술은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놀이의 활동이면서, 한편으로는 본질적으로 목적과 삶을 유지하고 촉진시키는 과제를 갖습니다. 그런데 니체의 다양한 분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니체가 놀이의 활동 영역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사유와 학문과 철학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니체는 하나의 올바른 해석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그릇되다고 말했습니다. 관점의 지속적 전환, 즉 지평이 매번 새롭게 교체되는 과정이 필연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니체의 능동적 해석 개념은 서로 다른 해석 유형들의 상호 작용, 관점의 의식적인 교체에서 나타납니다. 능동적 해석, 특히 의미의 다의성에 대한 니체의 관심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하나의 주제는 ‘가면’입니다. 세미나 시간에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눈 부분이 이 가면에 대한 것이었답니다. 가면이라고 하면 무언가를 숨김 또는 다른 모습으로 꾸밈 같은 것이 떠오르는데요. 니체가 말하는 가면의 개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애매~~합니다. 저자는 니체가 <작가의 수다스러움에 관하여>라는 잠언에서 수다스러움이라는 가면 뒤에 감추어져 있는 관점을 나열했다고 언급합니다. 니체는 생의 예술에서 지고한 성과를 낳은 것은 그리스인들이며, 그들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표면, 주름, 가상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니체의 이러한 사상이 가면과 위장, 아이러니라는 개념의 사용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니체의 논증에 따르면 심오한 정신에는 가면이 필요한데, 심오한 정신의 주변에서는 그의 모든 말과 모든 발걸음, 그가 부여하는 생의 기호가 끊임없이 잘못 해석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니체는 관점의 전환이나 기호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 가면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니체는 철학적 저작들을 해석할 때 한 철학자가 자신의 고유하고 최종적인 생각을 책에 표현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표면적인 세계 너머에 있는, 모든 근거 배후의 심연이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의 머리말에서 벨러는 니체를 형이상학적 해석의 체계적 틀 속에 가둬버리는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그의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논박하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등장한 니체 상을 검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썼습니다. 3장의 말미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니체를 읽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니체의 텍스트를 전체적으로 고찰하는 동시에 세부적인 문제들도 적절히 다루는 일이겠지요. 그 어려운 일을 해내겠다고 원모어 니체팀은 월요일 늦은 저녁마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경원샘 말대로 우리가 하이데거와 데리다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니체의 텍스트'에서 하이데거(형이상학)와 데리다(문체, 기호)가 어떻게 다르게 독해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지요. 이번 3장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 시를 짓거나 예술을 하는 활동이 아니라, "사유와 학문과 철학"에서 놀이, 즉 목적과 목표라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순진무구한 아이의 놀이와 같은 활동으로서 말하는 것이 와 닿았는데요. 이제 "철학"이 우리의 삶에서 작동을 시도해보아야 할지 않을까요. ㅋ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후기 어떻게 쓸지 고민하시던 샘 의 꼼꼼한 후기 잘 읽었어요. 감사해요(^^) (ㅋ 가면은 채운샘에게 질문하는거로 해결해보도록 하죠...)
경원쌤의 후기 덕분에 복습도 잘하고 이해 안되었던 것들이 조금 들어오네요. 쏙쏙 들어오는 후기 감사합니다. 우리는 가면을 이해하기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었지요. 그 가면이 위장일지, 변용일지, 관점의 전환일지, 기호에 대한 해석과 연관될지... 오늘 마지막 시간인데 지나고 나면 더 알게 되겠지요. 그 어려운 일을 하겠다고 원모어팀이 이렇게 모였다고 말하는 쌤의 말에 제 마음이 찡하네요.